스탠리 드러켄밀러는 어떻게 하루 만에 10억 달러를 벌었을까?

 

스탠리 드러켄밀러는 어떻게 하루 만에 10억 달러를 벌었을까? 그는 구조적인 약점, 비대칭적인 손익비, 그리고 빠른 손절 능력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갖춘 확신이 있을 때 과감하게 베팅하는 전략으로 영국 정부를 상대로 막대한 수익을 올렸습니다.



1. 스탠리 드러켄밀러, 거장의 탄생과 소로스와의 만남


스탠리 드러켄밀러는 피츠버그 은행의 패기 넘치는 직원에서 시작하여 30대 초반에 뉴욕 드래피스의 핵심 운용역으로 성장했으며, 조지 소로스와의 만남을 통해 시대의 통화 질서를 뒤흔드는 투자 역사를 써내려갔다.


1.1. 드러켄밀러의 성장 과정과 소로스와의 첫 만남

  1. 드러켄밀러는 피츠버그 은행의 평범한 직원으로 시작하여 30대 초반에 뉴욕 드래피스의 핵심 운용역으로 빠르게 승진했다. 

  2. 1987년 8월, 블랙먼데이 발생 6주 전, 당시 드래피스에 있던 드러켄밀러는 조지 소로스의 저서 '금융의 연금술'을 읽고 깊은 영감을 받았다. 

    1. 소로스의 책은 그의 투자 철학인 '재귀성(Reflexivity)'을 다루었으나, 난해한 서술로 인해 당시 월가에서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다. 

    2. 영문학도 출신이었던 드러켄밀러는 특히 통화에 대한 소로스의 통찰에 매료되어 직접 연락하여 점심 약속을 잡았다. 

  3. 소로스는 드러켄밀러를 만나자마자 즉석에서 오퍼를 제안했으나, 드러켄밀러는 바로 수락하지 않고 드래피스에서의 마무리를 이유로 시간을 끌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1. 이는 소로스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제안을 하고, 이를 덥석 받아들이는 사람을 해고하는 '함정 카드' 전략을 피하는 현명한 결정이었다. 

  4. 이후에도 두 사람은 빈번하게 교류했으며, 소로스는 개정판 서문에서 드러켄밀러를 만난 것을 행운으로 언급하며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인물이 월가에 있다는 사실에 반가움을 표했다. 


1.2. 블랙먼데이와 드러켄밀러의 유연한 대처

  1. 1987년 블랙먼데이 직전, 드러켄밀러는 시장의 고점 하락세를 예상하며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2. 그러나 블랙먼데이 직전 거래일인 금요일 오후, 다우 지수가 2,200선에서 지지선을 다졌다고 판단하여 모든  포지션을 청산하고 롱 베팅을 했다. 

  3. 같은 날 오후, 폴 튜더 존스의 폭락 예상 근거 자료를 접한 드러켄밀러는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주말 내내 기술적 분석을 공부하며 대비했다. 

  4. 월요일 아침, 드러켄밀러는 모든 롱 포지션을 청산했고, 시장은 그가 포지션을 정리한 직후부터 폭락하기 시작하여 당일 -22%를 기록했다. 

  5. 그는 숏 포지션까지 유지하며 수요일까지 성공적으로 거래를 마쳤고, 1987년 99%의 수익률을 기록하며 블랙먼데이 시즌을 무사히 넘겼다. 

  6. 이 사건은 드러켄밀러의 유연한 사고와 빠른 결단력을 보여준다. 거장이라도 자신의 판단을 쉽게 바꾸고, 필요하다면 자존심을 내려놓을 줄 아는 능력이 중요함을 시사한다. 

    1. 이는 '임포스터 신드롬'이 오히려 자신을 끝까지 믿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의심을 하는 동력으로 작용하여, 자기 판단에 매몰되지 않는 자산으로 기능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7. 영상은 투자자의 성향에 맞는 투자 스타일을 찾는 것이 중요하며, 타인의 투자 기법을 무작정 따라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강조한다. 


2. 소로스의 퀀텀 펀드 합류와 전설적인 투자 캠페인


스탠리 드러켄밀러는 블랙먼데이 이후 소로스의 퀀텀 펀드에 합류하여 독일 마르크화와 영국 파운드화 공매도 등 전설적인 투자 캠페인을 성공시키며 유럽 통화 질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1. 퀀텀 펀드 합류와 초기 투자 성공

  1. 블랙먼데이 당시 폴 튜더 존스의 자료를 공유받고  포지션을 바꾼 드러켄밀러와 달리, 소로스는 롱 포지션을 유지하다 큰 손실을 입었다. 

  2. 드러켄밀러의 빠른 태세 전환과 성공적인 수익을 목격한 소로스는 그를 적극적으로 영입하기 위해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3. 드러켄밀러는 약 1년간의 고사 끝에 1988년 말, 퀀텀 펀드에 리드 포트폴리오 매니저로 입사했으며, 듀케인 펀드를 병행할 수 있다는 조건까지 얻어냈다. 

  4. 퀀텀 펀드는 1970년 설립된 글로벌 매크로 전략의 대명사로, 1988년에는 이미 수십억 달러 규모의 운용 자산을 가진 거대 펀드였다. 

  5. 드러켄밀러는 퀀텀 펀드 합류 당시 해고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으나, 소로스로부터 배울 점이 많을 것이라 기대하며 이직을 결정했다. 

  6. 그는 소로스보다 독일 마르크화와 엔화 움직임에 대한 분석을 더 잘한다고 생각했지만, 소로스로부터 '맞았을 때 얼마나 벌고 틀렸을 때 얼마나 잃느냐'는 중요한 가르침을 얻었다. 

    1. 소로스는 "확신이 있는 트레이드에서는 급소를 노려야 한다. 돼지가 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7. 첫 번째 주요 캠페인은 1989년 독일 통일 이후 독일 마르크화 강세에 베팅한 것이었다. 

    1. 시장은 통일로 인한 혼란과 비용 증가를 예상하며 마르크화 약세를 전망했다. 

    2. 그러나 드러켄밀러는 통일이 독일 경제에 거대한 재정 확장 효과를 가져올 것이고, 이는 금리 인상으로 이어져 마르크화 강세를 유발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8. 이 베팅으로 퀀텀 펀드는 60%의 수익을 기록했으며, 이는 소로스의 안목과 드러켄밀러의 분석력이 결합된 성공 사례였다. 


2.2. 영국 파운드화 공매도와 ERM 붕괴

  1. 1992년, 소로스와 드러켄밀러는 영국 정부를 상대로 파운드화 공매도에 나서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2. 당시 영국은 유럽 환율 메커니즘(ERM)에 가입하여 독일 마르크화에 통화를 연동시키고 있었으나, 독일의 높은 금리와 영국의 고질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시스템 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 ERM은 유럽 국가 간 환율 안정을 통해 무역을 촉진하려는 시스템이었으나, 각국의 통화 정책 동기화가 필수적이었다. 

    2. 영국은 1990년 뒤늦게 ERM에 가입했는데, 이는 당시 9%에 달하는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명분으로 금리 인상을 단행하기 위함이었다. 

    3. 그러나 독일의 통일로 인한 경제 성장과 달리, 영국의 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 상태로 금리 인상이 기업 도산과 실업률 증가를 야기할 수 있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3. 드러켄밀러와 소로스는 영국 파운드화 가치가 비정상적으로 고평가되어 있으며, ERM 시스템이 구조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4. 이 가설을 뒷받침할 결정적인 증거를 찾던 중, 당시 소로스의 런던 사무소장이었던 스티븐 므누신(현 미국 재무장관)이 영국 부동산 시장의 취약성을 보고했다. 

    1. 영국이 높은 금리를 유지하면서 변동 금리 주택담보대출 비중이 높은 영국 가계는 이자 부담으로 고통받고 있었고, 주택 가격이 폭락하고 있었다. 

  5. 이러한 현장 상황을 바탕으로 드러켄밀러는 영국 정부가 파운드화 가치를 지키기 어렵다고 확신했고, 리스크 대비 리워드가 30대 1에 달하는 엄청난 기회라고 판단했다. 

  6. 1992년 9월, 독일 중앙은행 총재의 유럽 통화 조정 시사 발언과 이탈리아 리라화 평가 절하가 발생하며 ERM 시스템에 균열이 생겼다. 

  7. 드러켄밀러는 소로스에게 펀드 자산의 100%를 파운드 숏에 걸어야 한다고 제안했고, 소로스는 "100%가 뭐냐? 200% 해야 한다"며 레버리지 사용을 독려했다. 

  8. 1992년 9월 16일, '블랙 윈스데이'에 영란은행은 외환 보유고를 동원하고 기준 금리를 10%에서 15%까지 두 차례 인상하며 파운드화 방어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1. 영란은행은 하루에 약 270억 파운드의 외환 보유고를 사용했으나, 최종 순손실은 33억 파운드(약 60억 달러)에 달했다. 

  9. 결국 영국 정부는 ERM 탈퇴를 선언했고, 파운드화는 마르크화 대비 15%, 달러 대비 25% 폭락했다. 

  10. 이 사건으로 퀀텀 펀드는 10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으며, 그해 69%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11. 드러켄밀러는 이탈리아, 영국에 이어 스웨덴 크로나에 대해서도 비슷한 논리로 베팅하여 추가로 10억 달러를 벌었다. 

  12. 이 전설적인 캠페인들은 드러켄밀러의 분석력과 소로스의 '확신이 있으면 200% 가라'는 사이징 원칙이 결합된 결과였다. 

  13. ERM 시스템의 붕괴는 유럽 단일 통화인 유로화 탄생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1992년 9월 16일은 유럽 통화사의 분기점으로 기록되었다. 


2.3. 크게 베팅하는 원칙과 위험성

  1. '확신이 있으면 크게 가라'는 원칙은 위험하며, 이를 원칙으로 삼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1. 구조적인 확신과 후속 증거: 확신의 근거가 구조적이어야 하고, 후속 증거들이 명확해야 한다. 드러켄밀러는 파운드 트레이드에서 직감이 아닌 근거를 계속 점검했다. 

    2. 비대칭적인 리스크-리워드: 수익과 리스크가 비대칭적으로 커야 한다. 파운드 트레이드의 경우 30대 1의 손익비가 있었다. 

    3. 빠른 손절 능력: 틀렸을 때 빠르게 손절할 수 있어야 한다. 파운드화는 유동성이 높아 물리더라도 즉시 청산이 가능했다. 

  2. 이 세 가지 조건이 갖춰졌을 때 크게 베팅하는 것은 원칙이 되지만, 하나라도 빠지면 도박이 될 수 있다. 

  3. 그러나 8년 뒤, 드러켄밀러는 이 세 가지 조건 중 어느 하나도 갖춰지지 않은 포지션에 60억 달러를 투자하여 최대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4. 그의 최대 실패와 헤지펀드 은퇴 사건은 3부에서 다루어질 예정이다. 


댓글 쓰기

다음 이전

POST ADS 2